한국인이야기

바람과 물로 지은 강변의 집

by 강창석 on May 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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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어령
원제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0> 달래 마늘의 향기 ④
출처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ID=3592000

사주는 태어난 날의 시까지 따지면서 태어난 장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인에게 사주보다 더 무서운 것이 풍수(風水)인 까닭이다. 사주는 바꿀 수 없지만 장소는 옮길 수 있고, 사주는 살아있을 때만의 일이지만 풍수는 죽어서도 후손에 영향을 미친다. 풍수사상이 아니라도 살아있는 것은 모두 거처하는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여우는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사자성어가 생긴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캐나다의 중국계 인문지리학자 이후퉝은 ‘토포필리아’라는 말을 만들어 학계에 큰 관심을 일으켰다. 토포필리아는 희랍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Topo)’와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를 합쳐서 만든 조어로 ‘장소애(場所愛)’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연환경과 인간존재를 이어주는 정서적 관계를 나타낸 이론인데 풍수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서양에서는 그 말을 영국 시인 W H 오든이 먼저 썼다느니, 또 누구는 ‘통섭’으로 유명해진 에드먼드 O 윌슨의 ‘바이오필리아(生命愛)’가 토포필리아를 원용한 것이라느니 꽤나 시끄럽다.

하지만 한국의 시인 김소월은 그들보다 반세기도 전에 몇 줄의 시로 토포필리아와 바이오필리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htm_200905010.gif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후렴을 빼면 다 합쳐도 30자밖에 안 되는 시지만 그 속에는 한국인이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의 공간이 숨은그림찾기처럼 감추어져 있다.

“강변 살자”고 한 자연공간은 직접적으로 표현돼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전의 “엄마야 누나야”는 그게 “아빠야 형님아”와 대립하는 여성 공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과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에서 우리는 앞뜰과 뒷문의 전후 공간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앞 공간에는 반짝이는 빛의 시각공간이 있고 뒷문의 후방공간에는 갈잎의 노래가 들려오는 청각공간이 대칭을 이룬다. 금모래는 무기물의 입자요, 갈잎은 황금색과 대조를 이루는 초록색 유기물의 평면성이다. 빛과 바람소리로 진동하는 이 방향, 감각, 물질로 이루어진 공간은 뜰 앞에 흐르는 강물과 뒷문 밖을 에워싼 산의 전체적 경관을 보여준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는, 어디에서 많이 보고 들어본 경관 같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 먼 조상에서부터 오늘의 부동산 업자까지 목마르게 추구해온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집터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고향에 살고 있는 사람도, 타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지용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 부른 그 공간이다. 그게 기와집인지, 초가집인지, 하얀 집인지, 푸른 집인지는 몰라도 산과 강 사이의 경계에 있는 집터의 경관만은 산수화처럼 분명하게 떠오른다.

그것이 달래 마늘의 향내가 나는 한국인의 ‘토포필리아’다. 우리가 어릴 적에 “엄마야 누나야”라고 부르던 여성 공간이다. 우리가 ‘모국(母國)’이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디아스포라(실향민)’로서의 한국인에게는 다만 가슴속에만 존재하는 ‘부재의 공간’이다. “아빠야 형님아”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현존하는 그 장소는 적어도 그 아이가 살고 싶다고 노래한 그 강변은 아닐 것이다. 반짝이는 금모래가 아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아니다. 아스팔트의 길에서 위급한 구급차의 경보음처럼 외치며 경쟁하고 투쟁하고 땀 흘리면서 살아가는 남들(他者)의 공간, 디아스포라의 이국땅이다.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고/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노래를 시키면 나는 으레 이 노래를 불렀다. 손뼉을 치면서도 왠지 쓸쓸한 표정을 짓는 손님들 앞에서, 한국인들 앞에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고 노래한 그 시 속의 아이처럼, 나는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구성지게, 아주 구성지게 노래를 부른다. 그래야 칭찬을 많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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