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訓民正音] 발견 경위에 대한 논란

by 이유상 on Apr 2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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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원본이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어 서울의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원본에서 창제 원리를 비롯한 한글 창제에 관련된 모든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된 아주 중요한 문화재가 되었습니다. 1940년에 발견됨으로써 국보 제70호가되었지만, 실제로는 국보 제1호가되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훈민정음] 원본의 발견 경위는 정철 선생의 "원본《훈민정음》보존에 대하여"'라는 글에 의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글의 일부 내용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관련 글을 여기에 옮겨 소개합니다.

<자료 1>

원본《훈민정음》보존에 대하여_정철

여기서 말씀 드리려는 원본《훈민정음》은 이미 최현배님이 《한글갈》을 통하여 발표하신 전 형필 본(本)을 이릅니다. 이 원본《훈민정음》이 전 형필님 수중에 넘어갈 때까지 보존 경위를 밝히고자 합니다.

최 현배님의《한글갈》에 보면 원본《훈민정음》이 경북 의성 모 고가의 집에서 나왔다고 적혀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경북 안동군 와용면 주하동 이한걸(李漢杰)님 댁의 가보였읍니다. 이 어른은, 호 후촌(後村, 서기 1880-1950), 본관 진성, 퇴계의 종파이며, 일찍 선조께서 여진 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 대왕으로부터 상으로 받아(단 한권) 늘 궤 중에 감추어 세전가보로 남겨 오다가, 연산군 때 언문책 소지자를 엄벌할 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첫 머리 두 장을 뜯어 버리고 돌돌 말아서 서급()에 비장했던 것입니다.

후촌 이 한걸 선생은 임하명유(林下名儒)로서 안동 일원뿐 아니라 영남 일대에까지 성예(聲譽)가 자자(孜孜)한 분으로서 항적(抗敵) 지조와 그의 배일 교육열은 단단하였다. 선생의 장남에 용규(容規, 이리 농대 국어 강사로 재직 중 병사, 유(柳)님의 소개), 이남 용훈(容薰, 경북 안동 사범교 재직 중), 삼남 용준(容準) 세 자제가 있었으며, 삼남 되는 이 용준님은 서울 경학원(성대 전신)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성대 조교수 김(金)모의 가장 총애하는 제자였읍니다.

그 당시 전 형필님은 가산이 넉넉하여 김 모를 시켜서 귀중한 책이면 값의 고하를 불문하고 모조리 사들이게 하였읍니다. 이 때 이 용준님은 그의 가장 존경하는 스승 김 모에게 사사하는 가운데 자기 고향 안동에《훈민정음》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김 모는 곧 전 형필님으로부터 많은 돈을 얻어 가지고 당장에 안동으로 내려와서 친물을 보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원본《훈민정음》의 현품은 의외에도 표지부터 첫머리 두 장이 훼손되어 없어졌으므로 부득이《세종실록》본의 원본을 기억해 가면서 한지를 끊어 써 넣어 깁기로 하였읍니다.

기우려 해보니 암만해도 고색 찬연한 원본과는 차이가 많음을 느끼어 드디어 이 한지를 소죽 솥에 삶아 누른 빛을 내어서 원본과 비슷하게 재단하여 꿰어매고 이 용준님(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으로 하여금 원본 서체와 비슷하게 서사시켰읍니다. 원본은 연미 반제(軟美 盤齊)한 서풍으로 일가를 이루우신 안평대군의 글씨가 분명하며 이 용준님은 안평대군체에 조예가 있었으므로 글씨 자체로 봐서는 거의 다름없었으나 아무리 하여도 기운데는 완연히 달라 보였고 특히 의외의 오서 일자는 다름 아니라, 서문 말미에 "편어일용이"(便於日用耳)라 한 것을 "편어일용의"(便於日用矣)라고, 곧 이(耳)를 의(矣)로 쓴 것이 큰 유(瘤)가 아닐 수 없었읍니다. (물론 이 오자는 뒷날 알게 된 것임.)

이와 같이 하느라고 이 집에서 오래 묵은 김 모는 사학계(斯學界)의 연구 자료로 이 책을 서울로 가져 가기로 허락을 청하였읍니다. 이에 후촌 선생은 소원을 승낙하고 동시에 500여 년 전해 오던 국보 원본《훈민정음》은 김 모 수중으로(결국 전 형필님) 영도(永渡)ㅎ게 되었읍니다. 이에 김 모는 서슴지 않고 일금 삼천 원(1940년)을 사례금으로 책주 후촌 선생에게 치르게 되었읍니다.

김 모는 결국 이 책을 소원대로 구입하여 환경하여 전 형필님에게 전해 주고 이 소문을 만나는 사람마다 하게 되어 당시 조선어학회 회원을 비롯하여 이 책에 관심을 가진 이는 그 책을 보고 싶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읍니다. 이에 전 형필님은 애예(愛藝)한 이 책을 급기야 공개하게 되어 모두 실물을 보게 되었고, 그 가운데 최현배 님은 쉽사리 권두 보수한 것을 변별하셨을 뿐 아니라, 이(耳)를 의(矣)로 오서한 것까지 다 아시게 되었으며, 더욱 해방 후 국어 강습회 석상에서 말씀하시기를 후촌 선생 덕택으로 원본《훈민정음》이 전하게 됨은 실로 감개무량하다고 소회를 피력하셨읍니다.

그런데, 의성 모 고가로 와전(최 선생님은 뒤에 아시게 되었으나)된 것은 원 책주인 후촌 선생이 불선()한 사례금을 받고 세전가보를 남의 손에 넘겼다는 것이 불명예스러워 김 모에게 고의로 부탁한 소이가 있었읍니다. 이에 국보 원본《훈민정음》의 보존 경위를 널리 아뢰어 후촌 선생(後村 先生)의 문화애(文化愛)를 기리고자 합니다. (국어국문학 9,  1950)

<자료 2>
훈민정음 '사라진 두장' 미스터리 풀려_동아일보(2005. 6. 15)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의 맨 앞 두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은 조선 연산군(재위 1495 1506) 때가 아니라 18세기 이후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종이 뒷면에 쓰여진 글은 18세기 전후에 한글로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를 옮겨 적은 것이다."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1446)에 얽힌 궁금증들이 풀리게 됐다.

맨 앞의 두 장이 언제 떨어져 나갔는지? 낱장 뒷면에 빽빽하게 적혀 있는 한글은 무슨 내용인지? 국어학자 및 문화재 전문가들이 늘 궁금해 했던 내용들이다.

김주원(金周源 49 언어학) 서울대 교수는 이달 말 발표 예정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란 논문에서 이 같은 궁금증을 풀어냈다. 이 논문은 국어학회 학술지 '국어학' 45집에 게재할 예정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엔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의미, 용법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국보 70호 해례본은 세종 때 목판으로 찍어낸 해례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

해례본은 1940년 여름, 경북 안동시의 한 고택에서 표지와 맨 앞의 두 장이 떨어진 채로 발견됐다. 해례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소장자 측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월인석보(月印釋譜)'에 나오는 세종의 서문(해례본 앞 쪽의 내용)을 옮겨 쓴 뒤 그 종이를 합쳐 다시 제본했다. 그 해 문화재 수집가였던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이를 구입했고 지금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 연구는 해례본 낱장의 뒷면에 써있는 글씨를 해독하는 데서 시작됐다. 뒷면 글씨가 선명히 비치는 사진을 접한 김 교수는 사진편집기(포토숍)로 사진 속 글씨를 뒤집어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그 결과 '십구사략언해' 권1의 내용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십구사략언해'는 중국 명대의 왕실 자제 교육서 '십구사략통고'를 한글로 풀어 쓴 것. 김 교수는 옮겨 적은 글의 구개음화 등 각종 문법으로 보아 18세기 전후에 쓰여진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해례본 맨 앞의 두 장이 떨어져 나간 시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대목은 세 번째 장 뒷면의 글씨 내용이 '십구사략언해' 권1의 3장부터 시작된다는 점.

김 교수의 설명. "누군가 권1의 내용을 옮겨 적었다면 3장이 아니라 1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식이다. 권1의 1, 2장은 해례본의 맨 앞 두 장의 뒷면에 적혀 있었을 것이다. 분량상으로도 일치한다."

해례본의 두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은 옮겨 적은 이후, 즉 18세기 후라는 말이 된다. 학계는 한글 사용을 탄압했던 연산군 때에 맨 앞의 두 장이 사라졌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해 왔다. 이번 연구를 통해 그동안의 비과학적인 추론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이광표 기자)


<옮긴글-3

다음글: 『한글 새소식』제395호(한글학회, 2005년 7월호), 8-12쪽.
(한글학회 누리집(홈페이지)의 '한글새소식'에서 옮김)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
 

                                                                     박 영진
                                                                         부산 동래여중 교사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8월 경북 안동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국어국문학계는 일제의 굴욕 속에서 민족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중이었고, 특히 민족의 글자인 한글의 제자 원리에 대해서는 이해에 곤란을 겪고 있던 터라, 학계에 제공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런 곤란을 해소할 단서가 되어 수년 가뭄에 단비가 된 격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사의 뒷면에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처 경위에 대한 진실이 가리어져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첫 장이 연산군 때 훼손되었고, 그것이 500년 동안 고서 더미에 가려 있다가, 한 수집가에 의하여 수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본디 조상의 문헌을 소중하게 간직한 한 가문의 노력에 의하여 아무런 훼손 없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왔는데, 이 책이 외부로 빼돌려지는 과정에서 출처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첫 장이 훼손되어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본디 소장되었던 장소마저 왜곡되었다. 이 결과 오랜 세월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간수해 온 당사자는 외면당하고, 문화유산을 빼돌려 훼손한 사람이 도리어 공적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그 실상과 전말을 알리어 훈민정음을 500년 가까이 소장해 온 광산 김씨 긍구당(肯構堂) 가문의 노력을 세상에 알리고, 이 책의 출처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Ⅰ. 재고 동기
   필자는 20년 전 안동대학(한문학과)을 다니던 1983년 10월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 몇 사람과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의 동기생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고색창연한 긍구당이란 사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친구의 부친인 김 대중 어른으로부터 해묵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분실 경위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그때는 무심코 흘려들었다. 


   그리고 10년 뒤 고향 안동을 떠나 부산 동래여고에서 근무하며 우연히 훈민정음에 관한 글을 보게 되었다. 그 글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안동군 와룡면 주촌에 세거하던 진성 이씨 이 한걸(1880∼1951) 님의 소장본이며, 이 책으로 인해 우리 나라 국어학자들이 한글의 제자 원리를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문득 의문이 일었고, 내용의 전후 사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곧바로 김 대중 어른께 편지를 내어 그 내력을 문의하였다.


   그랬더니 이 어른께서는 친절하게도 그간의 경위를 소상하게 적어 답장을 보내 주시었다. 답장을 받고는 그 동안 학계에 알려진 내용과는 다른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고, 이 사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 대중 어른의 말씀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또 10년 세월이 지난 2002년 초봄에, 한글 학회 이사인 박 지홍 선생을 어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에 관한 자문을 하였더니, 이 문제에 대한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고 하시며, 허 웅 회장님께 말씀 드려 볼 테니 관련 자료를 빨리 정리해 줄 것을 요청하셨다.

 

   Ⅱ. 발견 경위에 대한 기존의 학설
   학계 및 사회에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의 발견 및 입수 경위에 관한 설은 다음과 같다. 


   세간에 알려진 최초의 설에 따르면,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은 1940년 8월에 의성의 어떤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안동고교에 재직하던 정 철(본명: 휘만) 교사가 1950년에 『국어국문학』에 [원본 훈민정음 보존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글에서 이 책은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에 살던 후촌 이 한걸 님의 세전 가보인 것으로 알렸다.


   이후, 정 휘만 님이 1954년에 『국어국문학』에 다시 쓴 [원본 훈민정음 보존 경위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김 민수 님의 『주해 훈민정음』, 서 병국 님의 『신강 훈민정음』, 안 춘근 님의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지학적 고찰] 등에서도 대략 아래와 같이 내용을 보완하여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따른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는 다음과 같다.

 

   1)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은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에 살던 이 한걸 님의 3남인 이 용준(1916∼?) 님에 의해 본가에서 1940년 8월에 발견되었다. 그 당시 이 용준 님은 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 수학하며 김 태준(『조선 한문학사』의 저자)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자기 집에 귀중한 고서가 다량으로 있다는 말을 김 교수에게 하였고, 그로 인하여 훈민정음 원본은 500여 년을 책 더미 속에 고이 묻혀 있다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2)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장하여 보존한 경위는, 진성 이씨의 선조 중에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분이 있어 세종대왕께서 상으로 하사한 것을 집안에 대대로 전하여 오다가, 연산군의 언문 탄압 때에 그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첫 장을 뜯고 뒤집어 뒷면에 다른 내용의 글을 써 두어 이 수난을 피하였다.


   3) 이 책을 발견한 후, 『훈민정음 해례본』에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이 없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김 교수와 이 용준 님이 합작하여 한지를 쇠죽솥에 삶아서 그 첫 장과 둘째 장을 원본과 비슷하게 고색창연하게 꾸몄는데, 조선 미술 전람회 서예 부문에 입선한 적이 있는 이 용준 님이 안평대군의 글씨체에 장기가 있었으므로 목판본의 서체를 직접 필사하여 완성본을 이루었다.


   4) 그리고 며칠 후, 두 분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몇 권의 불경 책을 가지고 상경하였고, 김 교수는 당시 고미술품 수집에 심혈을 기울이던 간송미술관 주인인 전 형필 님에게 책을 인도하고 그 사례로 이 한걸 님 부자는 거금 삼천 원(필자 주: 당시 논 1마지기 값이 100원임.)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소개한 김 태준 교수에게는 그때 함께 구입한 불경 책과 다소의 사례금이 주어졌다.

 

   이상의 내용이, 대체로 지금까지 학계 및 사회에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고 그것이 전 형필 님에게 인도된 경위이다.

 

   Ⅲ. 기존의 발견 경위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를 전하는 기존의 설을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부터 여러 가지 의문을 안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의 출처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의문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진성 이씨의 선조 중 여진 정벌에 공이 있어 세종대왕이 하사한 것'이라는 부분에 대하여: 


   이 용준 님은 진성 이씨 주촌종파의 후예이다. 그의 선조 중 세종조에 여진 정벌에 공이 있는 분은 이 용준 님의 19대조이며, 퇴계 이 황 선생의 증조부인 이 정 공을 말한다.


   증손인 퇴계 선생이 쓴 [증조고비묘갈지]에 따르면, "증조부는 세종 때에 최 윤덕 장군을 따라 북쪽 오랑캐를 토벌한 공이 있어 음직으로 영변판관을 거쳐 한산·선산 부사 등 세 고을을 살았고, 세조 때 원종공신에 녹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이 공훈으로 공신이 된 것은 세종 때가 아닌 세조 때이며, 이 정에 관한 어느 문적에도 서책을 하사 받았다고 적혀 있지 않다. 또한 퇴계 선생도 [묘갈지]에 다른 사소한 일까지도 자세하게 언급을 하였는데, 임금이 책을 하사한 이같이 중요한 일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더구나 진성 이씨 족보를 살펴보면 이 한걸 님 부자는 주촌종파는 맞으나 종손이 아니므로, 이 내사본을 자신의 집에 소장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2. '군공을 세워 서책을 하사 받았다'는 부분에 대하여: 


   조선 시대에 군공을 세운 공신이 임금이나 국가로부터 하사를 받는 물목은 대개 노비나 토지 또는 마필이나 비단 등이 상례였다. 그런데 서책을 하사 받았다는 것은 미심쩍은 일이다. 더구나 임금이 하사하였다면 이 영광스럽고 대단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그에 관한 기록이 남을 터이고, 이 서책에도 관련 표기가 명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사본과 관련되어, 어떤 서책이나 문헌에도 명시된 것은 없다. 더구나 『조선왕조실록』에도 『훈민정음 해례본』의 하사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3. '연산군의 언문 탄압으로 첫 장을 뜯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의 뜯긴 부분은 세종대왕 어제 서문과 정음의 발음 풀이 등 모두 두 장이다.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은 본디부터 한문으로 적혀 있고 글자 발음 풀이에도 정음은 몇 자만 적혀 있을 뿐이다. 언문 탄압에 뜯어 없앨 하등의 이유가 없다. 더구나 임금의 어제가 쓰인 부분이며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서책을 뜯어 버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것은 원래 소유자인 김 대중 님 집안에서는 대대로 모든 책 첫 장에 장서인(11쪽에 사진)을 찍어 놓았는데, 이 장서인을 없애기 위해 첫 장을 뜯었다는 전언이 훨씬 설득력이 높다.

 

   4. '뒷면에 다른 내용의 글을 써 두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지금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하지 않고 있어 실물을 보고 조사할 수 없으나, 해례본을 살펴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뒷면에 한글로 낙서처럼 쓰인 것이 여러 장 나타나는데 무엇인가를 일정한 배열로 베껴 썼고, 또 앞면 여백 부분에 낙서처럼 쓴 한문 문장과 『대학』의 한 구절이 쓰인 부분이 있다."고 한다.


   이 책 몇 장의 뒷면에 쓰인 한글 가운데 서체가 다른 부분이 보이는데, 이 글씨의 출처는 김 대중 님의 증조모인 도목 배씨의 친정 집안에서 가야리 광산 김씨 집안으로 보내온 한글 사돈지로 배접을 붙여 놓은 것이다. 이 사돈지 이야기는 기존 발견 경위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주장이다. 이를 확인하면 이 원본의 소장처는 증명이 될 것이다.

 

   5. '세종대왕 어제 서문의 첫 장이 없는 것을 원본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의 세 번째 장의 훼손된 정도로 볼 때, 앞의 첫째 장과 둘째 장도 훼손 상태가 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 번째 장의 책을 꿰맨 부분을 통해 보면, 앞의 두 장은 책 면의 왼쪽 밑 부분을 제외한 오른쪽 일부분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내사본은 원칙적으로 당연히 훼손된 부분에 배지를 넣어 원본을 살리면서 배지에 책 판형을 그려 넣어 복원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 방식을 취하지 않고 두 장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역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책 오른쪽 밑 가장자리에 찍힌 장서인을 없애려고 한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Ⅳ. 오백년 소장한 긍구당 종손 김 대중 님의 주장
   10년 전 김 대중 어른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긍구당의 『훈민정음』 소장 내력 및 구전되는 증언들을 대략 모아 보았다.

 

   1. 1991년 10월 18일에 긍구당 종손 김 대중 어른으로부터 받은 답장의 내용은 이러하다.

 

  …… 군이 알고자 하는 훈민정음 원본 관계는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지네. 지나간 과거사를 해명할 길이 없고 다만 애타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기억하였다가 편지하니 참으로 고맙네. 


   현 사회가 알고 있는 와룡면 주하동(주촌) 이 한걸 댁은 우리 셋째 고모의 시댁일세. 바로 이 한걸 씨의 삼남 이 용준 씨가 나의 고모부일세. 이 고모부 되는 이가 선전(지금의 국전)에 특선을 할 만큼 글씨도 잘 쓰고 글도 잘했네. 그러므로 조부(필자 주: 김 응수, 1880∼1957)께서 (필자 주: 사위를) 사랑하여, 오시면 책방에서 마음대로 책을 보게 하였다네. 그 분이 이런 점을 기회로 『훈민정음』 원본과 『김매월당집』을 가져갔네. 정음 원본에 앞에 두 장 없는 것은 우리 집의 책에는 앞 첫 장에 꼭 장서인을 찍어 놓네. 말짱한 책에 앞 장이 없는 것은 증인을 소멸하고자 함이 분명하고, 그리고 더 확실한 증거는 『훈민정음』 원본의 떨어져 부푼 곳에 언문 편지로 배접해 놓았네. 그 편지 내용은 우리 증조모께서 도목 배씨에서 오셨는데 도목서 우리 집으로 사돈 간에 하신 편지를 가지고 부해(책 떨어진 곳을 안으로 발라 놓은 것) 놓았다네. ……


   내가 어릴 때 조부께서 서( )군(이 용준 씨)에게, "너 이놈! 공부한 선비가 남몰래 책을 훔치다니 다시는 내 집에 발걸음을 하지 말아라!" 하시면서 꾸중하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네. …… 


   세상에 정의가 있다면 이렇게 억울한 일이 발계(필자 주: 發啓)될 날이 있을까! 지금 내 심정은 책을 찾자는 것이 아닐세. 책의 출처가 우리 집이었다는 것만 세상이 알았으면 하네. ……

 

   한편, 전화를 통해서 "그 당시 이 용준이 울면서 '사위도 반 자식인데 너무하다'면서 석양이 지던 길을 셋째 고모를 데리고 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시며 그때 보았던 정황을 알려 주셨고, 또 당시 『훈민정음 해례본』을 두고 "장인 김 응수 옹과 사위 이 용준 간의 불미스러운 일은 그 행위가 심정적으로 괘씸하였지만 두 옹서(翁 )간의 일로 치부되었고, 더구나 이 용준이 스승인 김 태준을 따라 월북함으로써 이 사건은 두 집안간의 말못할 일화로 남아 향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수면 속에 잠기고 말았다."고 하셨다.

 

   2.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500년 간 소장해 온 긍구당 집안 내력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관한, 당시 안동군 와룡면 가야리에 소재하는 긍구당은 광산 김씨가 오백 년 간 세거하여 오던 종가이다. 대대로 문한이 이어져 온 이 가문에 특별히 드러난 인물로는 국문학 작품을 다수 남긴 유일재 김 언기(1520∼1588) 님의 장남 갈봉 김 득연(1555∼1637) 님을 들 수 있다. 갈봉은 당대 필명이 있던 문인으로 국문 가사 [지수정가] 1편과 시조 63수를 남겼다. 본디 한글에 대한 애착과 문학적 소질을 겸비한 선비며 그의 생존시에 이 『해례본』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 대중 어른은 갈봉의 동생 만취헌 김 득숙(1561∼1649)의 14세 종손이다. 이 어른은 갈봉 김 득연의 서적과 유묵 들을 모두 보관해 올 뿐만 아니라, 현재 여러 가지 언해본과 가사 등을 소장하고 있다. 


   김 대중 어른의 조부 소계 김 응수 공은 안동에서 기미 만세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9인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이 의거로 안동 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치아가 모두 빠져나갔었고, 안동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구형 받아 미결수로 7개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었다. 그 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애국지사의 울분을 삭이고 있었던 그는, 오직 후진 양성에 일생을 보냈다.


   그는 1934년에 자신의 셋째 딸과 같은 면 주하리에 세거하던 진성 이씨 이 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의 혼인이 이루어지자, 문재가 뛰어난 사위를 사랑하여 긍구당의 책방에 언제든지 나들게 하며 공부를 독려하였던 것이다.

 

   3. 긍구당 집안에 내려오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계된 후손의 증언들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1) 위에서 설명을 하였지만, 김 대중 어른은 『훈민정음 해례본』 몇 장의 뒷면에 배접으로 붙은 한글 글씨는 증조모인 도목 배씨의 친정 집안에서 가야리 광산 김씨 집안으로 보내온 한글 사돈지라고 증언하고 있다. 기존 발견 경위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주장으로 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2) 세종대왕 어제 서문을 이 용준 님이 썼다고 하는데, 이 용준 님이 손수 쓴 글씨가 현재 긍구당에 많이 남아 있으니, 그 글자를 대조해 보면 자주 서고에 나들었음을 알 수 있고 이 용준 님의 훈민정음 첫째 장 위조 사실도 증명할 수 있다.


   (3) 김 대중 어른의 조부 김 응수 공이 이 용준 님에게 평소 긍구당 책방에 나들게 하며 책을 빌려주었다는 증거로는, 현재 긍구당에 이 용준 님이 토를 달고 공부한 『맹자』가 남아 있으므로 이를 증거로 삼을 만하다. 


   (4) 이 용준 님이 가져간 책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김매월당집』인데, 여기에는 장서인이 찍혀 있었다. 그 장서인의 내용은 "光山后人", "金致祥印", "聖應家藏" 등이다. 이 용준 님이 『훈민정음 해례본』 외에 『김매월당집』을 가져갔다는 것은 새로운 증언이다.

 

   Ⅴ. 결론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은 비록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과 훈민정음 해례의 두 편이 필사된 책이지만, 이 책이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증명하고 한국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데 기여한 공헌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이 지대한 공헌은 한글을 애용하고 수백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전해 온 문헌을 소중하게 간직해 온 한 가문의 정성으로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가문의 노력은 이제까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이 책을 통해 빛을 본 것은 다만 책을 가져간 자와 거금을 들여 고서를 수집한 수집가의 공로였고, 묵묵히 조상 대대로 전해진 문헌과 문화를 소중하게 지켜 온 사람들의 말없는 노력은 간과되어 왔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살아온 사람들이 제 조상의 문헌에 그리도 관심 없고 그리도 무심하여 왔단 말인가? 아니다. 조상들이 남긴 문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조상들이 지켜 온 말과 글을 소중하게 다듬어 가려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었다. 그 한 집이 긍구당이다. 그럼에도 그 소중한 『훈민정음』을 소중하게 간직해 온 노력은 무시되고, 그 책을 남몰래 가져가서 세상에 알린 것을 공으로 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이러함에도 아직까지도 그 진실이 잘못 알려져 있고 또 그것을 밝히려는 노력도 없다. 이는 심히 송구할 따름이다.


   이 용준 님이 서문 말미에 "便於日用耳"를 "便於日用矣"라고 오서한 것은 진실을 밝히라는 하늘의 뜻인지, 아니면 첫 장이 자신의 위서임을 알리려는 마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양심의 결과물인지 알 길이 없다.


   거듭 확인하거니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 한걸 소장본이 아니다. 이 책은 현재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에 세거하는 광산 김씨 유일재 김 언기(1520∼1588)의 차남 만취헌 김 득숙의 종가인 긍구당 종손들이 500년 가까이 소장해 온 보책으로서, 김 대중 어른의 조부인 소계 김 응수 옹의 소장본이 분명하다.


   끝으로, 이 책은 시골구석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한 집안에서 500년 동안 보관하며 배접을 하는 등 소중하게 간직해 온 책임을 밝힌다. 이제 이 책의 올바른 소장처와 그 발견 경위가 제대로 밝혀져서, 민족의 글자인 한글의 내력에 대한 연구 방향이 한 치의 오류가 없이 바르게 서고, 아울러 우리 민족 문화를 지극히 소중하게 보존했던 한 가문의 정성이 세상에 올바르게 알려지기 바란다.  
=== <옮긴 글-3>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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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글-4>

 

다음 글 : 『한글 새소식』제397호(한글학회, 2005년 9월호), 17-18쪽.
               (한글학회 누리집(홈페이지)의 '한글새소식'에서 옮김)

 

『훈민정음 해례본』의 진실은?                
                                      
                                               채 영현
                                  거창 대성정보고 교사

 

 

 『한글 새소식』제395호(2005년 7월)에 실린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라는 박 영진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려 증동 명예교수가 쓴 『배달글자』(2001, 한국학술정보 펴냄)라는 책이 우연히 거창 도서관에서 눈에 띄어 읽어 보았는데, 애초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없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 『한글 새소식』에, 박 영진 선생님께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소장처와 그 발견 경위에 대하여 기존의 학설과는 다른 견해를 발표한 글이 실렸습니다. 려 증동 교수가 쓴 책에는 박 영진 선생님의 주장이나 기존 학설과는 전연 다른 주장이 나와 있기에, 『한글 새소식』 독자 여러분들께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계된 려 증동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1.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한 기존의 학설
  (1) '해례본' 원본은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에 살던 이 한걸 님의 3남인 이 용준 님에 의해 본가에서 1940년 8월에 발견되었다. '세종대왕 어제 서문' 첫 장이 없는 것을 원본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2) 당시 고미술품 수집에 심혈을 기울이던 간송미술관 주인 전 형필에게 이 책을 인도했다.

 

  2.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한 박 영진 선생님의 주장
  (1)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 한걸 소장본이 아니라,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에 세거하는 광산김씨 김 득숙의 종가인 긍구당 종손들이 500년 가까이 소장해 온 보책으로서, 박 영진 선생님이 만났다는 김 대중 님의 조부인 김 응수 옹의 소장본이 분명하다. 


  (2) 이 한걸의 3남 이 용준이 몰래 가져가서 전 형필에게 팔았다.

 

  3.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한 려 증동 교수의 주장
  기존의 학설이나 박 영진 선생님의 주장과는 아주 다른 주장을 『배달글자』라는 책에서 하고 있는데, 그 주장의 대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세종대왕은 자기가 지은,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 책을 붓글씨로 쓴 책으로 두었을 뿐, 간행하지 못한 것은 중국 황제가 두려워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 이후 어느 임금도 책을 간행하지 못했다. 책으로 간행되지 않았으나, 그 책 내용은 『세종실록』에 실려서 전해지고 있다.


  (2)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에 이르기까지 세종대왕이 지은 붓글씨 책 『훈민정음』은 간행된 일이 없었고, 세종대왕이 지니고 있었던 '붓글씨로 쓴 훈민정음' 책은 보존되지 못하고 없어졌다.


  (3) 나라 잃은 시대에 『세종실록』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던 사람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일본 사람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였다. 오구라 신페이가 장사꾼 마음이 생겨서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세종실록 소재 훈민정음'을 베꼈다. 또 오구라가 1940년대에 규장각에서 '붓글씨로 쓴 훈민정음 해례'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는 두 책을 하나가 되도록 편집했다. 차례는 '세종실록 소재 어제 훈민정음+1940년대 발견 훈민정음 해례+실록 소재 정 인지 서문+세종 28년 9월 상한(上澣)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정 인지 근서'로 되었다.


  (4) 오구라 신페이가 자신이 편집한 것을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정서 시켜서 황색 칠을 했다. 옛날 책으로 보이려고 그렇게 했다.


  (5) 나라 잃은 시대에 오구라 신페이가 장사꾼 마음으로 편집한 붓글씨 『훈민정음』 책은 나라 잃은 시대에 편집된 위서이다. 짜깁기된 것인데 내용은 위서가 아니었다. 세종 시대에 간행되었던 책처럼 만들려고 조작한 위서였다. 오구라가 조선 서법을 모르다 보니, 범죄 행위에 발목이 잡히게 되었다. 오구라가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보고 베끼면서 잘못 적은 글자들이 있다. 그가 베껴 적은 '上澣'이라는 말은 조선인 서법이 아니다. '九月 日'로 적는 것이 조선인 서법이다. '九月上旬·九月上澣'으로 적는 것은 조선인 서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禮曹'를 '禮曺'로 적는 잘못을 했다. 책 뒤 마지막에 '訓民正音終'이라고 적어야 되는데, 일본 서법으로 '訓民正音'으로 적었다. 판심을 넣고 쪽수를 적었어야 될 것도 판심이 없고, 쪽수가 없게 되었다. 실수가 아닌 거짓말도 나왔다. 거짓말이 무엇인고 하니, 그 책 꼬리에 붙어 있는, 발문을 적은 정 인지 벼슬 적기에서 오구라 신페이의 거짓이 탄로되었다. 세종 28년 9월에 정 인지는 집현전 대제학이 아니었다. 세종 28년에는 집현전에 대제학이 없었다. 대제학을 비워두고 부제학이 수장으로 되었다. 세종 30년에 비로소 집현전에 대제학을 임명했고, 정 인지가 처음으로 집현전 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6) 오구라 신페이는 전 형필한테서 많은 돈을 받고 1942년에 '오구라 신페이 편집 위서 훈민정음' 붓글씨 책을 팔았다. 오구라 신페이가 조작한 붓글씨 『훈민정음』 책을 전 형필에게 넘기면서 당부한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은 '이 『훈민정음』 책이 안동 고가에서 나온 책이라고 할 것'이었다. 전 형필은 오구라 신페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간송 전 형필은 광복 후 조선어 학회 회원들에게 이 책을을 보여 주었다. 조선어 학회 회원들이 좋아라 하고는 1946년에 오구라 신페이가 편집한 위서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석판으로 대량 인쇄했다.


  (7) "안동 어느 집에서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나왔다."라는 말은 조작극으로 거짓말이었다. 세종대왕이 지은 '훈민정음'을 간행한 일이 없었는데, 세종대왕으로부터 하사 받았다고 했던 것이었다. 


  (8) 오구라 신페이가 조작한, 붓글씨로 쓴 『훈민정음』이라는 책은 50년이 안 되는 종이로 만든 책이다. 전 형필이 오구라 신페이한테서 넘겨받은, 붓글씨로 쓴 『훈민정음』 책은 지질이 아주 빳빳하다. 50년 전후 지질이었다. 지질 검사를 하면 거짓이 해달처럼 밝혀진다.

 

  려 증동 교수의 주장은 한 마디로, "전 형필이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나라 잃은 시대에 오구라 신페이가 편집해서 세종 시대에 출판된 것처럼 만든 위서"라는 것입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실물을 조사해 보면, 박 영진 선생님의 주장대로 '해례본'의 몇 장의 뒷면에 한글로 낙서처럼 쓰인 것이 있는지, 려 증동 교수의 주장대로 만든 지 50년이 안 된 종이로 된 책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책의 지질 검사를 해 보면 원본의 소장처나 오구라 신페이의 조작 여부는 명백히 밝혀질 것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한 진실이 하루빨리 온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 옮긴 글-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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