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기록

보한재집(保閒齋集)의 훈민정음 관련 기록

by 강창석 on Oct 0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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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신숙주

bohanjaejip3.jpg1. 자료 해설 :

'保閒齋集'은 훈민정음 관련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문신·학자인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시문집이다. 아들 정(瀞)·준(浚) 등이 유고를 모아 편찬한 것을 1487년(성종 18) 왕의 명으로 간행하였고, 1645년(인조 23) 후손 숙(瀟)이 개간(改刊)하였다. 아래 내용은 문집 내용 가운데 훈민정음과 관계있는 기사 내용만 추려 모은 것이다.  

2. 기록 원문과 국역문

  
ㄱ. 卷十一附錄 行狀(晋山 姜希孟 撰)
(前略)上 以本國音韻 與華語 雖殊 其牙舌脣齒候淸濁高下 未嘗不與中國同 列國皆有國音之文 以記國語 獨我國無之 御製諺文字母 二十八字 設局於禁中 擇文臣撰定 公實承睿裁 本國語音 註僞正韻失傳 時適翰林學士黃瓚 以罪 配遼東 乙丑春 命公隨入朝使臣到 見瓚 質問音韻 公以諺字 華音 隨問輒解不 差毫釐 瓚大奇之 自是 往還遼東 凡十三度 (中略) 公 俱通漢倭蒙古女眞等語 時或假舌人 亦自達意 後公手飜 譯語以進 舌人 賴以通曉 不假師授  

권11부록 행장(진산 강희맹 지음)
(전략) 임금(세종)께서 우리나라 음운이 화어(중국어)와 비록 다르나 그 '아/설/순/치/후, 청/탁, 고/하'가 중국과 마찬가지로 다 갖추고 있어야 되고, 그리고 여러 나라가 모두 제 나라 언어음을 나타낼 글자를 가지고 있어서 제 언어를 기록하고 있으나 홀로 우리나라만이 글자가 없다고 하셔서 언문 자모 28자를 만드시고, 궁중 안에 기관을 설치하여 문신을 뽑아 언문관계 서적을 편찬할 때, 공이 실지로 임금의 재가를 받들었다.
우리나라 어음이 그릇되어 정운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는데, 때마침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지어 요동에 귀양을 와 있었으므로 을축(세종 27년) 봄에 공에게 중국에 가는 사신을 따라 요동에 가서 황찬을 만나 음운을 물어 보라고 명하시어, 공이 한글로 화음을 옮겨서 묻는 대로 척척(빨리) 깨달아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황찬이 크게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요동에 다녀오기 무릇 열세번이었다. (중략)
공이 한어·왜어·몽고어·여진어등에 모두 통하여 때때로 혹시 통역의 힘을 비는 일이 있어도 역시 스스로 뜻을 통했다. 나중에 공이 손수 외국어를 번역하여 나라에 바치니 통역들이 이에 힘입어 밝게 통하여 스승한테 배우지 않았다.  

ㄴ. 卷十一 附錄 墓誌(門人 吏曹參判 李坡 撰)
(前略) 世宗 以本國音韻…凡十三度(同一內容重複)  

권11 부록 묘지(문인 이조참판 이파 지음)
(전략)세종께서 우리나라의 음운으로... 무릇 열세번이다. (행장의 내용과 중복됨)  

ㄷ. 卷十一 附錄 碑銘(陽城 李承召 撰)
(前略) 世宗 以諸國各製字 以記國語 獨我無之 御製字母二十八字 名曰諺文 開局禁中 擇文臣撰定 公 獨出入內殿 親承睿裁 定其五音淸濁之辨 紐字諧聲之法 諸儒受成而己 世宗 又欲以諺字  華音 聞翰林學士 黃瓚以罪 配遼東 命公隨朝京 使入遼東 見瓚質問 公聞言輒解 不差毫釐 瓚大奇之 自是 往返遼東 凡十三度 丁卯秋 中中試第四人 超授集賢應敎 庚午春 翰林學士倪 謙等 賚詔到國 世宗 命公從遊 蓋欲問和中原典故 且學韻語也 翰林 一見如舊 相與唱酬 稱公爲東方巨擘 (中略)
公 旁通 諸國音韻 手飜諸譯以進 學譯者 不煩師授 易以通曉  

권11부록 비명(양성 이승소 지음)
세종께서 여러나라가 각각 글자를 만들어서 제 언어를 기록하는데 홀로 우리나라만이 글자가 없다고 하여 자모 28자를 만드시어 언문이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궁중 안에 (언문 관계)기관을 설치하여 문신을 뽑아 여러 서적을 짓게 할 때 공만 홀로 내전에 드나들며 임금의 재가를 직접 받아서 오음(성모)의 청·탁 구별과 성모·운모법을 정하고, 다른 학자들은 완성된 결과만을 받을 따름이었다.
세종이 또 언문으로 화음을 옮기려고 할 때,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지어 요동에 귀양왔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중국 가는 사신을 따라 요동에 가서 황찬을 만나 질문을 하라고 명하시니, 공이 황찬의 말을 듣고 빨리 깨달아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황찬이 크게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요동에 다녀오기 무릇 열세번이었다.
정묘년(세종 29년, 1447) 가을에 중시의 제4등으로 붙어서 집현전 응교로 특진되었다. 경오년(세종 32년, 1450) 봄에, 한림학사 예겸 등이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세종이 공에게 함께 교유하도록 명하셨는데 대개 중국의 전고를 물어서 알고 또 운학 관계를 배우고자 함이었다. 한림학사 예겸이 한번 보고 오랜 친구처럼 여겨 시를 주고 받고, 공을 동방이 훌륭한 학자라고 일컬었다. (중략)
공이 널리 여러나라의 음운에 통하여 직접 여러 언어를 번역하여 왕께 바치니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스승의 가르침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쉽게 깨우쳤다.

ㄷ. 卷十二 年譜
(前略) 癸亥 公 二十七歲
春 爲司直 除日本國通信使書狀官 卞仲文爲上使 (중략) 九箇月 還朝奉撰御製諺文 上 以本國音韻 與華語雖殊 其牙舌脣齒喉 淸濁高下 未嘗不與中國同 列國皆有國音之文 以記國語 獨我無之 御製諺文字母二十八字 設局於禁中 擇文臣撰定 公 實承睿栽太虛潗云 英陵 初制諺文 集賢諸儒 合辭抗疏 陳其不可 英陵 明申文忠及崔恒等八學士 掌其事 作 訓民正音∇國正柔書 東方語音 始正 東方歷代記云 世宗丙寅 遂倣篆· 制二十八字母 演作諸字 使鄭麟趾 成三問 申叔舟等 撰定 因命往見黃學士 質問十三度 與太虛集 小異  

권12 연보
(전략) 계해(세종 25, 1443) 공 27세
봄에 사직이 되고, 일본국 통신사 서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변중문이 상사이었다. (중략)
9개월만에 귀국하여 명을 받들어 「어제 언문」을 지었다. 상감(세종)께서 우리나라 음운이 화어와 비록 다르나 그 '아/설/순/치/후, 청/탁, 고/하'가 중국과 마찬가지로 다 갖추고 있어야 되고, 여러 나라가 모두 제 나라 어음을 나타낼 글자가 있어서 제 언어를 만드시고, 또 궁중 안에 기관을 설치하여 문신을 뽑아 언문 관계 서적을 편찬할 때, 공이 실지로 임금님 재가를 받들었다.
태허집에서 말하기를 영릉(세종)께서 애당초 언문을 만드실 때, 집현전 여러 학자들이 연서하여 반대하는 글을 올리고, 그 옳지 않음을 말씀 드리니, 세종께서 신 문충공(숙주) 및 최항 등 여덟 학사에게 그 일을 맡아서 훈민정음·동국정운을 짓도록 명하시니, 우리나라 어음이 비로소 바르게 되었다.
동방역대기에 말하되 세종 병인년(세종 28, 1446)에 드디어 중국의 전자(篆字)·주자( 字)를 본받아 28자모를 만들고 여러 글자를 부연하여 만들 때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에게 책을 짓도록 시키시어, 명을 받들어 황학사에게 질문하러 열세 번을 찾아 갔었다고 하였으니 태허집의 내용과 조금 다르다.

ㄹ. 乙丑 公 二十九歲
使遼東 飜華音定五聲 O時皇明學士黃瓚 以罪配遼東 公往見質問 隨問輒解不差毫釐 學士大奇之 丙寅 公 三十歲 使遼東 與中朝翰林學士黃瓚 質問音韻 往還十三度  聞 錄云 申文忠公 與成三問 學華音干遼東 一年三往 多有唱和之 乙亥 公 三十九歲 二月 與成三問 譯訓洪武正韻  

을축(세종 27, 1445) 29세
요동으로 사신으로 가서 화음을 번역하고 오성을 정하다. O당시에 명나라 학사인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으로 귀양와서 있었다. 공이 찾아가 물어보고 묻는데 따라 빨리 깨달아서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학사가 이를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병인(세종 28, 1446) 요동으로 사신으로 가서 중국의 한림학사 황찬에게 음운을 물어보다. 열세번 다녀왔다.
소문쇄록에서 말하기를 신 문충공(숙주)이 성삼문과 함께 요동에서 화음을 배우고 일년에 세 번 갔었으며 서로 주고 받았던 시가 많다.
을해(세조 원년, 곧 단종 3년 1455) 2월에 성삼문과 함께 홍무정운을 번역하고 새기다.  

ㅁ. 保閒齋集 卷第九 題 譯生崔潑約韻圖尾
夫天下 書同文 而各因其方 五成之用 遂不同 然推其源 不過五聲七音 縱橫經緯而已 故散之則萬變無窮 約之則三聲 相爲管綴 而其變有數 今之學華音者 皆事其末 不究其源 乃至七音相陵 五聲相混 曾不知所以辨之 猶執以爲是而莫之察 老於譯者 皆若是 後學靡然趨之 蓋可嘆也已 觀子之圖 實得其要 可謂能拔俗而獨立矣 苟如是不已其於變訛歸正乎何有 然其紐攝之機 必須口授而後 得梗槪矣 當爲子  兩端而竭焉 姑題其尾而歸之 以 之云  

역학생 최발이 만든 약운도 끝에 붇인 글
대저 세상에는 똑같은 문자·문장(漢字·漢文)생활을 하나 각각 지역적인 조건에 따라서 오성(五聲)의 쓰임(즉 언어생활)이 마침내 같지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 근원을 밝혀보면, 오성 칠음이 가로 세로의 경(經)과 위(緯)로 나타내질 수 있을 뿐이다. (즉 자음과 모음, 성모와 운모를 가로로 배열하여 언어음 곹 자음이 이들의 결합으로 다 나타내어질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들을 흩터 놓으면 모든 변화가 끝이 없고, 이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3성(초·중·종성)이 서로 엮어져서 그 변화가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어(漢語)의 음을 공부하는 이들이, 모두 말단적인 것만을 일삼고 그 근원을 살피지 않아서, 칠음을 서로 무시까지 하고 오성을 서로 섞어서 일찍이 이를 분별할 까닭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것(잘못된 것)을 옳다고 고집하여 살피지 않았다. 노련한 역관도 모두 이렇고, 젊은 역관들도 휩쓸려서 이런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니 대개 한탄할 만한 일이다.
이제 역관생 최발의 약운도를 보니 실로 그 요점만을 얻어서, 세속에 뛰어날 수 있으므로 독립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그 변하고 잘못된 것을 바르게 돌아가게 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그러나 그 유(紐, 성모)와 섭(攝)의 기틀은 반드시 입으로 전수된 연후에 그 대강을 얻을 것이므로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양쪽 극단을 통틀어 다하니, 잠시 약운도의 끝에 글을 쓰고 이를 돌려 주어서, 이에 힘쓰라고 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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